현실과 동떨어진 하자보수 기준·준공하자 마자 소송 대비할 판
"하자 보수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논란이 많은 하자에 대해 법원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게 아니냐."(A건설사 고객지원 담당)
"어디까지 하자로 봐야되는지 정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감정인의 재량권을 제한하는 기준 설정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B엔지니러이사 대표)
서울중앙지방법원 건설실무연구회에서 펴낸 '건설감정실무'에 대한 건설업계의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건설감정실무는 엄밀히 따지면 한 지방법원에서 발행한 책자에 불과하고, 일종의 권고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감정인이 이를 따를 의무는 없다. 그러나 법원이 제작한 만큼 공신력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이에 따른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지난 22일 건설회관에서 광운대 건설법무대학원 주최로 열린 '건설감정·분쟁포럼'에서는 건설감정실무가 도마 위에 올랐다. 감정인으로 활동하는 건축사 및 기술사, 하자 보수를 담당하는 건설사 직원 등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건설감정실무의 내용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자소송을 다른 법원에 비해 제법 많이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건설감정실무를 처음 발행한 것은 아니다. 전문성이 부족한 판사들의 이해를 돕고 감정인들마다 다른 감정기준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동안 해마다 발행해 왔다.
그러나 이번 건설감정실무가 업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은 하자소송에 가장 민감한 감정평가의 기준을 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전자소송에 대비한 감정내역서 표준 양식이 포함돼 있다.
포럼에 참석한 한 감정인은 "제각기 다른 내역서 양식을 통일하는 것은 이해한다. 객관성을 갖는 평가기준을 설정하는 취지도 동의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기준을 둬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모두 하자로 판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건설은 여러 공정과 다양한 자재를 통해 만들어진 매우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때문에 하자 감정은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중견건설사 고객지원부 관계자는 "가뜩이나 하자분쟁소송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하자를 판정한다면 소송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이에 따른 보상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라며 "부동산경기 침체로 힘겨운 건설사들에게 주택사업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최근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기획소송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법원이 나서서 기획소송의 아이템을 준 꼴이나 다름없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2003년 60건에 불과했던 하자분쟁 소송건수는 2006년 100건을 돌파한 뒤 2009년 290건에 이르렀다. 6년 사이 거의 5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아파트를 준공하면 곧바로 하자소송을 대비해야 한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올 정도다.
이에 대해 건설감정실무 연구TF팀에 참여한 한 연구위원은 "법원 관계자뿐 아니라 감정인 등이 참여해 16차례 회의 및 5차례의 세미나를 거친 끝에 만든 결과물이다. 여기에 두 차례 감정인들의 의견 청취도 진행됐다"고 답했다. TF팀을 이끈 서울중앙지방법원 고충정 부장판사는 "현재로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언급을 회피했다.
하자소송 관련 전문인 법무법인 화인의 정홍식 변호사는 "누가 실무작업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공정성에 의문을 갖는 이해관게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건설감정기준에 대해 건설업계가 반대의견을 나타내듯, 만약 건설사들이나 건설관련 협회에서 기준을 제정한다면 그 역시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처럼 이번 논란을 계기로 객관적이면서 공정하고, 또 합리적인 건설감정기준을 정립하기 위해 앞으로 건설사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의 심도있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회훈 기자 ho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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